기독교 교육·노동운동 최초 실시

1899년까지 서울 관문 역할 수행

창영초등학교 인천 3·1운동 불씨

6·25전쟁 직후 헌책방 거리 태동

▲ 창영동 골목길 풍경

창영동은 개화를 알리는 기적(汽笛) 소리에 잠을 깨며 한동안 신식 동네로 살아왔다.

인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가는 길목인 이 동네는 인천의 근대교육, 기독교, 노동운동이 발아한 곳이다.

한동안 묵은 것만 움켜쥐고 바튼 기침만 하며 점점 박제가 돼 가던 이 동네는 하마터면 큰 수술을 받을 뻔했다.

이 동네에 불어닥친 개발 바람은 호불호의 논쟁을 일으키며 오히려 관심과 활기를 불어넣었다.

오랫동안 수면 무호흡증에 빠져있던 동네가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인천의 자존심을 지키며 나잇값 하는 ‘꼰대’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 배다리 한점갤러리 맞은 편 커피숍 앞에서 한 할머니가 앉아서 어디론가 눈길을 주고 있다.

창영동은 인천의 근대 역사가 관통하는 곳이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놓이기 전 제물포항에서 서울을 가려면 이 길을 거쳐야 했다.

개항 후 포구에서 싸리재 거쳐 배다리 옆을 지나 쇠뿔고개로 가는, 이름하여 경인가도(京仁街道)다.

이방인들이 오고가다보니 낯선 풍경의 집들도 들어섰고 별난 이야기도 만들어졌다.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로 조선 어린이들을 가르치고자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인천의 3.1운동 만세 불씨는 이 학교에서 지펴졌다.

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상급반 학생들이 만세의 첫 깃발을 올렸다.

그들은 어느 단체의 지령이나 누구의 지시도 없이 자발적으로 항일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정오에 학교를 출발해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학생들과 배다리에서 합류해 동인천역 부근 채미전 거리 등 시내 중심지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대한독립’을 외치면서 시민들이 궐기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창영초교총동창회는 지난 1995년 3월 6일 모교 교정에 횃불 모양의 웅대한 자연석으로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를 세웠다.

70년대 말까지 창영동이 인천의 중심지였기 때문인지 창영학교 아이들은 송현동, 만석동 등 당시 변두리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얼굴색이 좋았다.

한마디로 기름지고 뽀앴다.

그 학교에는 부잣집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고적대와 야구부 등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창영학교 소풍날은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징크스가 계속되다보면 ‘설화’가 만들어지는 법. 학교 우물을 팔 때 거기에 살던 용을 죽였다는 혹은 소사 아저씨가 막대기로 용의 꼬리를 쳤기 때문에 그 용이 원한에 사무쳐 저주를 내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변두리 학교 아이들에게는 창영학교 아이들의 이런 불운을 보면서 자신들은 참 좋은 학교에 다닌다고 애써 자위하곤 했다.

맑은 햇살이 빨간 벽돌건물을 선명하게 비춘 늦가을 날, 창영학교를 찾았다.

야구부원들이 함성을 주고받으며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학교 담벼락에는 ‘메이저리거 류현진의 모교 창영초 야구부원 모집’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세월은 흘렀어도 창영의 야구부는 여전히 부러움의 대상이다.

문제는 학생 수다.

한창 많을 때 한해 입학생 수는 1천여 명 정도로 전교생은 6천명을 웃돌았다.

이제 그것은 빛바랜 학적부에나 있는 숫자일 뿐이다.

요즘 입학생 수는 40여 명.

이제는 야구팀 하나 채우기 벅찰 만큼 아이들 보기가 힘들어졌다.

창영은 소풍날의 징크스가 있었던 그 시절이 못내 그립다.

창영학교 담 옆으로 영화학교가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 미국인 처녀 마거릿 벤젤 은 1891년 22세 때 평양에서 인천으로 건너와 당시 내리교회 한국인 전도사의 딸을 가르쳤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 영화초등학교의 출발이다.

1909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정식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이듬해 싸리재에 있던 학교를 현 위치에 2층 벽돌집 교사를 마련해 이전했다.

머릿돌을 박은 지 이제 100년이 넘는 이 교사는 교실마다 스팀난방이 설치된 당시로서는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최초의 여성박사이자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을 비롯해 한국 최초의 여대생 김애리시, 이화학당 이사장 서은숙, 이화여대 사범대학장 김애마, 이화여대 음대학장 김영의. 영화배우 황정순, 노동운동의 대모 조화순 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창영교회 옆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선교사들은 이곳을 ‘에즈버리 동산’이라고 불렀다.

1893년 선교기지를 세우기 위해 이 일대의 땅을 매입해서 지금의 인천세무서 자리에 남자선교사 사택을 지었다.

그 옆에는 안데르센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고풍스러우면서도 앙증맞은 여선교사 사택을 지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에 건평 469㎡(142평) 짜리로 마루가 깔린 복도를 따라 아래 윗층에 각각 5개의 방이 있다.

서울과 평양에 주재하고 있는 여선교사들이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는 휴양공간을 겸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지하에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문화재급’ 보일러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보일러의 연료는 조개탄으로 탱크에서 가열된 수증기를 각 실로 연결된 관을 통하여 보내는 방식이었다.

‘미싱이 돌아갈 때 실이 실패에서 풀려나가듯 인생도 자연에 순응하며 그렇게 흘러가는 것. 어떤 모양으로 풀려나갈지 박음질이 되어질지, 그 숙제는 우리가 푸는 것…’ 창영동 길 중간쯤에 있는 박의상실 쇼윈도에 써 있는 글귀다. 의상실 주인이 궁금해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느질 인생에 대한 제 이야기이자 소회죠” 박태순(62) 씨는 6번지, 3번지, 9번지 등 창영동 골목에서만 40년 넘게 실패를 돌렸다.

1976년 당시 인기 직장이었던 동일방직에 취업하려고 했는데 키가 작아 떨어졌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키는 155㎝. 거기에서 딱 1㎝가 모자랐다.

친구와 함께 양재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배다리에 ‘미스박 의상실’이란 간판을 걸었다.

동생 뒷바라지 때문에 결혼도 안하고 돈을 벌 요량이었다. 처녀가 결혼 안 한다는 말은 거짓말 중의 거짓말. 그는 결혼했다.

그래서 슬그머니 간판에서 ‘미스’를 지워버렸다.

함께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은 골목만 늙어갈 뿐 자신들은 늙지 않은 것으로 서로 착각하는 것인가.

이웃 삼성서림 사장님은 아직도 그녀를 ‘미스 박’이라고 부른다.

“한때 이곳은 일류는 아니지만 골든의상, 정의상, 르네의상 등 대여섯 개의 의상실이 있었어요. 한창 때는 미싱사 등 4, 5명을 두고 하루 3벌을 만드느라 밤새기 일쑤였어요. 이제는 저도 단골 10여 명의 옷만 만들 정도예요.”

▲ 배다리 헌책방 거리 초입

헌책방거리에서 60년간 ‘집현전’이란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오태운(87) 사장.

이 집은 동인천 대한서림 다음으로 오래된 책방이다.

헌책방 거리는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거리에 이동식 리어카 책방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시작됐다.

1960년대 서울 청계천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헌책방 거리가 형성됐다.

오 사장은 영어 관련서적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학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미군부대 등을 돌아다니며 헌책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면 책을 사려는 학생들이 책방 앞에 줄을 섰다.

“1960, 70년대 줄을 서 책을 구하려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미래가 밝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참고서 외에는 책을 찾지 않아 그게 안타까워.”

이 헌책방 거리에는 우리나라 문학의 거두 박경리 선생의 숨결이 가련히 맴돌고 있다.

박경리는 경남 진주여고를 졸업한 이듬해인 1946년 1월 30일 김행도 씨와 결혼했다.

당시 22살 젊은 새댁으로 신혼의 단꿈을 꾸던 그는 1948년 이삿짐을 싸야만 했다.

남편이 멀리 인천의 주안염전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이삿짐을 푼 곳은 금곡동 59번지.

주안염전 사택인 ㅁ자 형 한옥에서 다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남편이 근무하는 염전이 내려다보이고 낯선 이국적 건물들이 간간이 눈에 띄고 증기기관차가 큰 소리를 내며 자주 지나가는 마을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시장이 있어 종종 물건이나 사람 구경삼아 나들이를 했다.

광복 직후 먹고 살 거리를 찾기 위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이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온갖 고물과 중고 물품들도 좌판에 깔렸다.

그 틈에서 낡은 책들을 발견했다.

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마음에 드는 책을 손에 쥐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쭈그리고 앉아 읽었다.

아예 그는 책을 모아 작은 헌책방을 열었다.

박 작가는 인천에서의 이 2년을 그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꼽았다.

이 행복한 책 읽기는 장강(長江)과 같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대하소설이요,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파란과 격동의 역사를 살아 온 한국인의 삶을 담아 낸 명작, ‘토지’를 집필하는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 배다리 헌책방 거리의 터줏대감’아벨서점’

이러한 사실은 헌책방 아벨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곽현숙 대표가 박 작가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읽다가 약력에 ‘인천시 동구 금곡동에서 2년간 살았다’는 내용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그러나 금곡동 59번지라는 지번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

그동안 수차례 번지가 변동되어 현재는 61번지 등 여러 번지로 분산돼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천세무서 뒤쪽 인천산업정보학교 정문 앞을 거쳐 동구청으로 가는 길에 있는 동네 일대가 금곡동 59번지였다는 것만 확인되었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 곳>

▲ 조선인촌(성냥)주식회사

▲조선인촌(성냥)주식회사

1917년 인천부 금곡리(옛 문화극장 일대) 2천여 평의 대지 위에 조선인촌(성냥)주식회사가 들어섰다.

남녀 직공 5백여명이 ‘우록표’ ‘쌍원표’ 등 연간 7만 상자의 성냥을 만들어 당시 국내 성냥소비량의 20%를 점유한 국내 최대의 성냥공장이었다.

지방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이기도 했다.

성냥공장 주변 금곡동과 송림동 지역의 5백여 가구가 성냥갑을 만들어 공장에 납품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성냥갑 만드는 일이 인천지역 최고의 가내수공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남선교사 합숙소

1895년 존스목사가 한국 서부지방 선교기지를 꿈꾸며 창영동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였다.

남선교사 합숙소는 1897년 현재의 인천세무서 자리에 세웠다.

1942년 정미업자 주정기가 이 건물을 매수하여 거주하기도 했으며 조선알루미늄공업 합숙소로 사용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후 경기도경찰전문학교 교사, 교장 사택을 거쳐 1955년에는 동인천세무서 청사로 개축되었다.

▲ 아펜젤러 사택

▲아펜젤러 사택

존스목사는 189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기 현재의 금곡동 58번지에 아펜젤러 사택을 세웠다.

이 집은 아펜젤러와 존스박사의 사택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병원으로 잠시 사용되었다가 1925년 경성전기가 매입하여 변전소로 개축하였다.

현재는 인천성서침례교회당이 들어서있는데 이 교회 옥상에 올라서면 왜 이곳을 선교사의 사택으로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사방팔방 인천이 한눈에 시원스럽게 들어온다.

▲인천양조장

1920년대 초반, 인천에는 한국인 소유의 양조장 14개, 일본인 소유 7개 등 21개의 양조장이 있었다.

1926년에 설립한 인천양조장은 황해도 평산 출신 최병두가 설립한 인천 최초의 양조장으로 70여 년 간 소성주를 빚었다.

1996년 술맛을 좌우하는 이 일대의 지하수의 수질 저하로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청천동으로 이전했다.

2003년 1월부터 3년간 아벨서점 전시관으로 활용되었고 이어 민운기 씨가 이끄는 지역 문화단체 ‘스페이스 빔’이 2007년부터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입구에는 은색 깡통 로봇이 약간은 고뇌에 사로잡힌 듯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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