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항쟁 승리 보다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이희환 박사의 인천史 산책-45
’87년 체제’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2014년 06월 27일 금요일
▲ 인천의 6월 항쟁 집회 모습. /사진제공=<말>지
“모든 계층의 남녀노소들이 무리를 지어 쫓고 쫓기면서 밤낮없이 거리를 질주했다. 그들이 내건 최대의 구호는 ‘독재타도’였다. 시위대는 시간이 갈수록 수천명에서 수만명으로, 다시 수십만명으로 불어났고 대규모 군중집회를 동반한 대중열기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시위양상도 초기의 비폭력에서 폭력사용 쪽으로 발전, 시민무장론 속에 돌과 화염병이 날고 때론 각목까지 등장했다. 이처럼 수그러들 줄 모르고 확산돼가던 시위 열기 속에 4·19혁명을 쿠데타로 뒤엎고 외세를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후 26년간을 국민 위에 군림해온 정치군부집단의 철옹성은 마침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87년 8월1일자로 발행된 <말>지는 ‘6월항쟁’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표지에 위와 같이 격정적으로 1987년 6월을 기록했다. 서울을 비롯해 지방의 여러 도시들의 6월항쟁 현장을 다룬 르포기사를 통해 <말>지는 거대한 87년 민주항쟁 승리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했다. 인천이라고 결코 다르지 않았다. 1987년 6월10일, 인천의 가톨릭회관에서는 오후 내내 가두방송이 흘러나왔다. 인천의 7개 단체로 구성된 ‘호헌분쇄 및 민주개헌을 위한 인천지역공동대책위원회’는 가톨릭회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6·10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당시 인천의 인구는 140만명 정도. 항구 주변으로 대규모 공장이 밀집해있고 주안, 부평공단을 중심으로 약 40만명의 노동자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할 6·10 집회는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부평역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오후 6시, 부평역에서는 애국가 낭송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국민대회가 시작됐다. 지나가던 택시 기사들이 경적을 울리며 집회에 호응했다. 십자가를 앞세운 시위대가 도로로 나오자 곧 주변의 시민 학생들이 합류해 시위대는 곧 2000여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장기집권 획책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대형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전경들이 잇따라 최루탄을 난사했지만, 함께 모인 시민들은 골목길에 흩어졌다 다시 모이길 반복하면서 결국 부평역 도로 앞을 점거하고 연좌시위를 전개했다. 오후 7시가 지나자 퇴근한 인근 공단의 노동자들이 “노동3권 쟁취, 민주노조 결성, 잔업 철폐, 임금 인상” 등의 요구를 외치며 시민과 합세하자 곧 격렬한 시위가 전개됐다. 이날 시위는 부평역을 출발해 공단을 끼고 계속 이동하면서 진행됐다. 오후 10시쯤 효성동 사거리에서 다음의 투쟁을 약속하면서 해산했으나, 그 시각 이후에도 부평역과 안병원 앞 등 부평 곳곳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산발적 시위는 6월10일 밤늦도록 계속됐다.
7개 지역단체가 함께 구성한 인천공대위는 실무회의를 통해 인천의 6·10항쟁을 이끌어갔다. 5월24일 집회에 이어 6월10일과 18일, 26일 대규모 집회를 준비했다. 공대위에는 7개 단체 이외에도 비공개로 활동하던 노동운동 단체와 학생 등 인천의 민주, 민중운동 세력 전반이 직간접적으로 자리를 함께 하면서 협의체로 운영해나갔다고 한다. 김병상 신부, 조화순 목사 등이 공동대표를 맡고 상임집행위원단과 집행위원장 체제로 운영됐다. 그러나 인천공대위는 6·10 대회 직후인 6월12일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집행국장 안영근, 인천가톨릭노동청년회장 강석태, 인천기독청년회장 김영철 등 3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나머지 단체 대표 5명은 수배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한번 거세게 일기 시작한 민주화의 물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인천의 거리를 뜨거운 함성으로 메웠다.
6월10일 첫 집회 이후 인천의 6월항쟁은 거의 매일 인천의 곳곳에서 전개됐다. 동인천역과 부평역이 주요한 무대였고, 이곳이 막히면 주안과 석바위, 심지어 송림로터리에서도 시민과 학생, 노동자들이 한데 어울려 “민주헌법 쟁취, 독재타도”를 외쳤다. 6월17일에는 수천의 학생, 시민들이 동인천역 앞 도로와 광장을 점거하고 집회를 가졌는데, 동인천역 광장부터 용동마루턱까지 인파가 빼곡했다고 하니, 인천 역사상 가장 많은 시민들이 모였던 집회로 기억될 것이다. 이날의 집회는 주안1동 선당에서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한 시국기도회와 가두시위로 연결돼 석바위까지 행진으로 이어져 자정이 넘어서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6월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집회와 6월26일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전개되면서 거대한 시민들의 물결이 굽이쳤던 87년 6월의 인천거리는 그러나 점차 희미해지는 기억과 몇 장의 사진으로밖에 남아있지 않다.
87년 6월민주항쟁의 승리로 출범한 소위 ’87년 체제’를 넘어 ‘2013년 체제’를 만들자는 담론이 지난 수년간 논의되기도 했지만, 아쉬운 기대, 헛된 전망으로 끝났다. 여야 정치인들마저 ’87년 체제’를 넘어서자는 주장을 너도 나도 제기하는 형국이지만, 2014년 6월 인천의 거리는 세월호 촛불집회와 월드컵 거리응원의 상반된 모습을 잠시잠깐 연출할 뿐, 어떻게 ’87년 체제’를 넘어서 보다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지 좀처럼 가닥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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