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8 19:09수정 : 2014.04.09 18:11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래 한국 노동운동은 유신독재에 맞서 싸우며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의 하나로 성장했으나 당시 언론은 침묵하거나 외면했다. 사진은 70년대를 통틀어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청계피복노조’ 관련 3건의 기사 가운데 하나로, 75년 1월6일치에 실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69)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운동을 파악하지 않고는 1970년대를 논할 수 없다. 70년대는 해방공간에서 생겨났던 다양한 노동운동 가운데 어용노조만 남겨놓고 모조리 청소한 이승만 정권 이후 처음으로 자주적·민주적 블루칼라 노동운동이 태동한 시기이다.두말할 것도 없이, 자주적·민주적 블루칼라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로부터 비롯됐다. 사실 전태일이 분신한 평화·통일·동화시장은 영세업체 수백개가 난립한 아주 열악한 노동시장으로서 노동운동이 뿌리내리기에는 최악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소선 어머니와 삼동친목회를 비롯한 전태일의 동지들이 펼친 노동운동은 최소한의 생존 임금, 10시간 노동, 체불임금 해소 등 그야말로 노동자 생존권 확보를 위한 투쟁이었다.청계피복노조운동에 대해 정권과 노동세력·학생운동·재야세력·종교계, 나아가 각계 지식인 사회 모두가 주목한 것은 최저의 목표를 위해 최대의 희생을 치른 전태일이 남긴 상징성 때문이었다. ‘전태일 정신’은 이승만 정권 이래 박정희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노사협조주의·투항주의·어용노조로 일체의 노동운동을 끌고 온 한국노총을 거부하고, 자주적·민주적 노동운동을 확립시키는 노동자 의식혁명이었다. 물론 평화시장 업체들과 박 정권은 청계노조를 어용화하거나 무력화하려 했다. 전태일의 상징성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전태일 사건 이후 노동운동에는 새로운 지원세력들이 생겨났다.해방신학·민중신학에 눈뜨기 시작한 종교계는 노동자들을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일꾼’으로 여겼으며, 학생운동 세력은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동력을 노동세력에서 찾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분신 충격으로 각성한 학생운동권에서도 노동야학이나 노동자 되기 운동에 나섰으나, 70년대 초반 개신교와 가톨릭의 ‘노동 선교’가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미쳤다.대표적 예가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로부터 도움을 받은 동일방직노조와,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은 원풍모방노조 등이 72년 민주노조로 새출발한 것이다. 널리 알려진 동일방직이나 원풍모방 말고도 71~75년 산업선교의 영향을 받은 노조는 전국적으로 동광통산노조·한영섬유·마산방직·월성섬유·크라운제과·동아염직·삼송산업·반도상사·태양공업·삼원섬유·신한일전기·신흥제분·한국마벨 등 무수히 많았다.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75년 긴급조치 9호 이후 한국노총을 앞세워 자주민주 노조를 전면적으로 파괴하자, 산업선교는 더 이상 지난날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집단해고 당하고 감옥 가는 자주민주 노조원들을 지켜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조 9호 시대’에는 신규 자주노조의 창설은커녕 기왕의 자주노조를 지키기에도 역부족이었다. 박 정권은 77년 이소선 어머니마저 구속시키고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을 강제 폐쇄했으며, 78년에는 섬유노조를 앞세워 동일방직을 ‘사고지부’로 지정하고 이총각 지부장 등 조합 간부 4명을 제명했고, 회사는 노조원 124명을 무더기 해고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하지만 당시 언론은 자주노조운동과 그로 인해 일어난 각종 사건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외면했다. 70~79년 <동아일보>에서 다룬 청계피복노조, 동일방직 노조, 원풍모방 노조에 대한 기사만 살펴봐도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청계피복노조 기사는 10년간 단 3건이었다. ‘70년 11월27일 7면-청계피복노조 결성’ ‘11월23일 7면-노동청, 평화·통일·동화상가 근로감독 강화’ ‘75년 1월10일-아직도 저임, 형편없는 작업장, 10시간 미만 노동은 2.9%뿐’. 그나마 이 시기는 동아투위 언론인들이 쫓겨나기 이전 자유언론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때였다. 이후 77년 동아일보는 이소선 구속, 노동교실 폐쇄 같은 노동탄압 사건에 대해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동일방직 노조와 원풍모방 노조에 대한 기사는 각각 2건에 그쳤다.한국 언론에서 70년대 자주민주노조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 역사였던 셈이다.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정리도움 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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