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총각은 1966~67년 동일방직에서 노동현장 체험을 한 감리교 여성 목회자 조화순 목사(가운데)를 만나면서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61년 조지 오글 목사가 터를 잡은 인천시 동구 화평동의 인천산선 사무실로, 초가지붕이 인상적이다. 사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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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14
1967년 5월 어느날 이총각은 회사 구내식당으로 가는 길에 교양지를 나눠주고 있는 한 여성을 보았다. 파란색 투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는 웃는 얼굴이 예뻤다. 훗날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JOC) 투사 선배들로부터 그가 바로 인천산업선교회(산선) 실무자인 조화순 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일방직에도 지오세와 마찬가지로 산선에서 교육받은 회원이 많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총각은 자기와 같은 의지를 가지고 일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말에 반갑고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조화순 목사가 동일방직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지 오글(한국 이름 오명걸) 목사 덕분이었다.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두번째 파송지인 시흥의 달월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안수를 받았던 1966년의 어느날이었다. 오글 목사와 함께 온 조승혁 목사가 인천지역에서 산업선교회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산업선교라는 말도 처음 들은 조 목사는 별로 달갑지가 않았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이 많은 그곳에 여성 목회자가 없고, 노동자들과 똑같이 노동을 해야 하는 일이라 힘들어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에 그는 결단을 내렸다.초창기 산업선교는 복음 전도를 목표로 삼은 까닭에 예배와 성경 공부 등이 주된 활동이었으나, 직접 노동현장을 체험하는 산업선교 실무자들이 배출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노동자 개개인을 영적으로 구원하는 것만으로는 그들이 산업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며, 현실적인 문제와 사회구조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었다.당시 인천산업선교회는 오글 목사가 구입한 인천시 동구 화평동의 초가집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한달간 기본교육을 받은 조 목사는 66년 11월1일부터 6개월 동안 동일방직에서 노동 체험을 했다. 목회자 신분에서 노동자로 다시 태어나라는 의미로 공장 활동을 의무적으로 하게 했지만, 조 목사는 언제 어디서든 전도를 하는 것이 목사의 직분이라는 소명을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오글 목사를 통해서 알게 된 한 사람 말고는 누구도 그의 목사 신분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동일방직 노동자가 된 조 목사가 맨 처음 일한 곳은 구내식당이었다. 그때 나이 서른넷이었으니 그곳에서 일하던 여느 아주머니와 같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해보는 일에 그는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무엇보다 힘든 일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겪는 모멸감과 수치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다지 힘들지 않은 삶을 살아왔고 목사로서 더더욱 떠받듦에 익숙해진 그였다. 느닷없는 생고생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럴 때마다 오글 목사의 말을 되새겼다.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라. 노동사회에도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배워라.” “노동자에게 선교하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버려라.”두번째로 배치받은 곳은 마지막 공정인 정포과였다. 여성 노동자 70~80명이 속해 있었는데 대부분 18~23살 어린 나이였다. 조 목사는 친근하게 다가가며 말을 붙이고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그러자 대번에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반장이 호통을 쳤다. 근무 태도가 틀려먹었다고 소리 지르며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그는 너무 망신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모욕을 당하는 일이 계속되었고,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문득 깨달았다. 모욕과 수치를 통해 진정으로 낮은 곳에 임하시는 예수를 만난 것이었다. 증오심에서 흘렀던 눈물이 참회의 눈물로 바뀌었다.6개월간의 노동현장 체험은 조 목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계속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과, 그들이 받는 차별이 같은 여자로서 남의 일로 여겨지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