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와이드·역사]해방이후 시대별 인천 민주화운동
“자주독립” 묵직한 함성에서 시민 권리 향한 몸부림까지
김민재·윤설아 kmj@kyeongin.com  2014년 12월 26일 금요일 제10면 작성 : 2014년 12월 25일 19:07:29 목요일

1945년 부두노동자 6천여명 노조 결성
4·19운동 인천공고학생 700명도 동참
삼원섬유 노조 설립 부평4공단에 영향
인하대교수 “언론자유 보장” 시국선언
민노총 등장에 지역 노조협의회 해산

■해방후
1945년 8월15일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 일어난 민주화 운동은 해방과 전쟁이라는 혼란의 시기에 있었던 민중억압에 대한 저항이었다.

인천에서는 1945년에 인천지구노동조합평의회, 인천청년동맹, 인천문학동맹을 비롯해 실업자·교육자·부녀 등 수십개의 조직이 결성돼 ‘자주독립·자주통일’을 외쳤다. 부두 노동자 6천여명이 모인 인천부두자유노동조합(현 인천항운노조) 역시 이때 결성됐다.

1946년 2월에는 죽산 조봉암(1898~1959)을 주축으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임시연합인 민족주의민족전선 인천시위원회가 발족했다. 조봉암은 인천 지역구에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진보당을 창당해 활동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됐다. 조봉암은 2011년이 돼서야 대법원 전원합의부의 무죄 선고를 받았다.

■1960s
1960년대는 ‘민주화’에 대한 갈망의 시기였다. 1960년에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하기 위해 인천시내 초·중·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는데 연표에 따르면 4월19일에는 인천공업고등학교 학생 700여명이 시위를 감행하기도 했다.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동운동의 불씨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1967년 발간된 ‘인천시노동사정분석’을 보면 1965년 12월부터 1966년 11월까지 인천지역 31개 노동조합 1만9천665명이 쟁의에 참가했는데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분석이다.

1961년에는 노동자들에게 인권교육과 선교를 하기 위한 조직인 인천산업전도위원회(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조직됐다.

1963년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기업 노동조합인 대우자동차(현 한국GM)의 전신인 신진자동차 노동조합이 출범했다. 부평공장지부는 1969년 본격적으로 노조를 결성하려 하자 주동자 8명이 전출돼 무산되기도 했지만 이들은 꾸준히 권위주의에 반대하며 198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1970s
▲ 동일방직 똥물사건.
1970년대 인천은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대표적인 사건은 삼원섬유 노조 설립과 동일방직 똥물투척사건이다.

1973년 12월 삼원섬유 노동자 120명은 근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고, 이듬해 노조 결성에 들어갔다. 사측은 간첩이 개입된 노조 결성이라며 이를 저지했지만, 긴 투쟁 끝에 노조 설립을 이뤄냈다.
삼원섬유 노조 설립은 이후 부평4공단의 노조 결성에 큰 파급을 미쳤고, 주변 공장에서 잇따라 노조가 설립됐다.

동일방직 똥물투척 사건은 인천의 노동자들이 얼만큼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었다.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노조가 대의원 선출을 위한 투표를 감행하자 사측에 매수된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조합원들에게 똥물을 끼얹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거리로 나앉은 노동자 126명을 해고했고, 전국의 노동계가 동일방직 사건 해결을 위한 집회에 나섰다.

이밖에 1977년 8월 28일에는 답동성당 김병상 신부가 유신 철폐 및 언론 자유를 주장하다 구속되기도 했고, 1978년 11월 7일 도시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이 이어지고 있었다.

■1980s
▲ 1988년 전국노동자 대회에서 노동자들이 혈서로 작성한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1980년대는 점차 활발해지던 노동운동의 열기가 민주화 운동으로 확산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인하대학교 교수는 언론자유 보장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인하대 학생 3천여명도 군사 정권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하고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노동현장에 직접 들어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가르치고 노조를 설립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 시기 가장 주목할만한 사건은 단연 1986년 5월 3일 주안 시민회관 사거리에서 있었던 5·3항쟁이다. 이날 신민당은 개헌 현판식을 개최하려고 인천시민회관에서 가두행진을 벌일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사회단체와 시민이 대거 동참해 민중운동으로 확산됐다.

항쟁은 하루 뿐이었지만 수배자를 찾는 과정에서 연행된 대학생이 부천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고, 국회에서 5·3항쟁을 지지하면서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가 타올랐다. 인천 5·3항쟁이 6월 항쟁과 무관치않은 것을 보여준 것이다.

■1990s
1990년대는 그간의 노력으로 제도적인 민주적인 절차가 갖춰진 시기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은 완벽하게 자리잡지는 못한 시기였다. 군사정권에 대한 투쟁보다는 환경과 노동 등 시민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던 때였다.

1991년 계양산 골프장 건설 반대를 위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고, 1995년에는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운동이 전개됐다. 한편 1995년 12월에는 민주노총의 설립에 따라 그동안 인천 노동운동을 이끌어 온 인천지역노동조합 협의회가 해산했다.

김민재·윤설아기자 ㅣ 사진/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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